아르메니아인들이 아제르바이잔인들에 대해 저지른 유혈 학살 희생자들을 추모하며

아제르바이잔 공화국에서 아제르바이잔인들의 학살의 날로 기념하는 3월 31일은 1918년 3월 아르메니아인들이 아제르바이잔인들에 대해 저지른 유혈 학살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날이다.

아제르바이잔의 구바 지역에 위치한 대학살 기념관
아제르바이잔의 구바 지역에 위치한 대학살 기념관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 이후 볼셰비키는 바쿠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아르메니아 민족당인 다쉬나크수튠 당을 현지 상황을 활용하는 동맹으로 지명하였다. 러시아 볼셰비키 지도자인 블라디미르 레닌은 아르메니아인 스테판 샤움얀을 코카서스 특별 위원으로 임명했다.

비극적인 3월 사건들이 시작될 때, 바쿠 소비에트와 다쉬나크수튠 당은 반혁명적 요소와의 싸움을 펼친다는 명목 하에 바쿠 지방 전역에서 아제르바이잔인들을 청산할 계획을 세웠다. 추후 스테판 샤움얀 본인도 인정하였듯이 바쿠 소비에트의 무장 군인 6000명과 다쉬나크수튠 당의 무장 군인 4000 명이 아제르바이잔 민간인 학살에 가담하였다. 3월 30일 아르메니아-볼셰비키 부대는 바쿠에게 함대에서 사격을 가하였다. 그런 다음 무장한 다쉬나크들은 아제르바이잔인들의 주거지를 공격하고 오직 민족성 때문에 그들에 대해 무자비한 학살을 수행하였다. 이 기간 동안 아르메니아-볼셰비키 부대는 바쿠에서 2만명이 넘는 아제르바이잔 민간인을 몰살시켰다.

다쉬나크들에 의한 아제르바이잔인들의 대량 학살은 바쿠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짧은 시간 내에 아르메니아인들은 샤마키, 구바, 이래반, 잔가주르, 카라바흐, 나흐치반 및 카르스에서 학살을 저질렀다. 그 결과 1918년의 첫 5개월 동안 구바 지방에서만 16,000명 이상이 극도의 야만적인 행동으로 살해되었다. 총 167개의 마을이 파괴되었으며, 그 중 35개 마을은 현재까지 존재하지 않다. 아르메니아인 세력들은 또한 구바에서 현지 유대인들을 학살하였다.

1918년 3월 학살은 잘 준비되었고 인종 차별과 인종 청소라는 고의적인 정책을 바탕으로 아제르바이잔인들에 대한 무자비하게 실시되었다.

1918년 3월 사건들은 아제르바이잔 민주 공화국의 선포 이후 관심의 초점이 되었다. 아제르바이잔인 인구에 대한 폭력을 조사하기 위해 1918년 7월 15일 아제르바이잔 민주 공화국에 의해 특별 조사위원회가 설립되었다. 이 위원회의 중요한 특징은 러시아인, 유태인, 폴란드인, 조지아인, 심지어 아르메니아인 등 다양한 국적을 대표하는 당시 최고의 변호사들로 구성되었다는 것이다. 증거를 바탕으로 동 위원회는 평화적 인구에 대한 다양한 범죄로 기소된 194명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기 위해 128개의 보고서와 초안을 준비하였다. 따라서 8 월 중순까지 바쿠에서는 24명, 샤마키에서는 100여명이 체포되었다. 이것은 아제르바이잔인들에 대해 자행된 대량 학살 정책에 대한 정치적, 법적 평가를 수행하려는 첫 번째 시도였다. 그러나 아제르바이잔 민주 공화국의 몰락으로 이 작업을 완료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1991년 독립을 회복한 후, 아제르바이잔 공화국은 1918년 3월 대량 학살에 대한 정치적 평가를 재개하였으며 아제르바이잔 민주 공화국의 미완성된 정의 실현 시도를 완료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1918녀 3월 비극의 80주년 전날, 헤이다르 알리예프 전 대통령은 3월 31일을 애도의 날로 선언하는 법령을 발표하였다. 이 법령은 20세기 초 아제르바이잔인들에 대한 집단 학살 행위에 대한 정치적, 법적 평가를 수행하기 위한 핵심 문서가 되었다.

아제르바이잔인들 집단 학살의 날을 기념하는 것은 과거와 현재의 아제르바이잔인들에 대한 학살과 인종 청소의 사실에 관해 세계 공동체의 인식을 높이는데 초점을 둔다. (주 대한민국 아제르바이잔 공화국 대사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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