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시 더 갤러리서 박계희 초대전 개최

시온칸 배희권 부회장

풍경이나 꽃이 아닌 바위덩어리에서 부서져나간 돌들을 관찰하고 묘사하여 그 속에 도사리는 우주를 그리는 독특한 여류화가의 초대전이 안산시에 소재하는 더 갤러리(THE GALLERY)에서 3월 24일부터 4월16일까지 개최된다. 박계희 작가는 모래를 캔바스에 바르고 그 위에 돌이나 자갈, 소라 등 자연의 소산물들을 천착해서 꾸준히 작업을 하고 있는 작가이다. 전업작가이자 전업주부이기도 한 박작가는 20년의 화업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는 가운데 크고 작은 아트페어, 단체전을 수차례 걸쳐서 진행했으며 이번 전시는 7번째 개인전이 되는 샘이다. 100호 규모의 대작들과 함께 30여점의 주옥같은 작품들이 전시 된다.

박계희 작가는 사실주의적 화풍으로 정지된 돌의 이미지를 통해서 시간과 존재의 영원성 그 위대함을 메시지로 전달하고 있다.

 불가에서는 옷깃을 스치는 인연을 맺기 위해서는 많은 세월이 필요한데 한 평 정도 되는 정육면체의 바위덩어리가 잠자리 날개 같은 선녀의 옷자락이 스쳐서 모두 먼지로 변해 없어질 때 까지를 말하는 ‘겁’이라는 세월의 단위가 그 몇 겁이 흘러야 인연이 이루워지는 것이라 했다. 곧 바위덩어리라는 존재는 영원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단지 불가능에 가까운 어떤 경우의 수에 의해서 물리적 충격이나 접촉으로 존재의 방식이 변화할 수 있을지라도 본질은 변하지 않고 영원한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작가가 공간속에서 그것을 관찰하면서 그림을 그리게 될 돌과의 인연이 참으로 기이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하물며 인간의 인연이란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것인가. 우주와 세상의 이치는 이렇듯 필연과 우연의 엮임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렇듯 우리의 의식을 우주로 확장시켜 본다면 우주의 모든 삼라만상이 우연과 필연, 만남과 이별로 점철된 과정이란 것을 알 수가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커다란 지구 덩어리가 다른 행성과 부딪히면 깨어지고 부서진다. 그것이 바위덩어리가 깨지고 부서지면 돌이고 자갈이고 모래알이다. 지구나 커다란 바위덩어리가 어떤 물리적 충격이나 접촉이 없이 그 존재로 지속된다면 그 바위 덩어리는 영원히 존재한다. 그러나 우주공간이나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들은 언젠가는 변화를 맞이한다. 커다란 바위덩어리가 그대로라면 그 모습으로 영원할 것이지만 풍화작용. 또는 지각변동이나 지진이라도 몰아치면 커다란 존재는 부서져서 마침내 작은 모래알갱이가 되고 먼지가 된다. 이렇게 존재를 의식하고 말할 때 우리는 시간이라는 것, 소위 세월이라는 것에대해 생각한다.

생성, 소멸하는 모습으로 인식되는 지구에서는 시간과 세월이 존재한다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영원한 관점에서 보면 시간과 세월은 없는 것이다.

태양이 회전하면서 일출과 일몰의 관경을 보여주면서 춘,하,추,동 계절의 모습을 바꿔가며 변화하면서 생로병사를 맞이하며 살아가는 존재에게는 시간이란 의미가 있을 뿐, 원래 시간은 없고 세월은 흘러가지 않는다. 그냥 존재의 변화 만 있을 뿐인데 우리는 그것을 시간 또는 세월이 흐른다고 말하는 것이다.

바위덩어리가 분쇄된 파편, 돌을 그린다는 것은 커다란 바위덩어리의 부서진 조각을 바라보는 것이다. 곧 어떤 존재의 변화된 단면을 관찰하며 그리는 것이다.

영원한 존재인 커다란 바위덩어리가 어떤 물리적 충격과 접촉을 통해서 다른 형태로 변화 되거나 깨져서 나눠진 것이 돌이다. 형태가 달라졌을 뿐 그 존재의 본질은 변화지 않는 것이다. 시간이란 관점 또는 영원이란 관점에서 작은 돌이라 할지라도 그 존재론적인 측면은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그녀가 집요하게 사실적으로 묘사한 돌을 보고 영원한 시간의 조각이라고 지칭하고 싶다. 바위덩어리에서 분리 되었지만 돌 역시 영원한 존재인 것이다.
원소나 원자들은 사실 사람의 눈으로는 볼 수없는 미미한 존재지만 소멸되지 않는 영원한 존재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이 우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영원한 것이고 소중한 것이다. 한낱 바람에 이는 먼지라고 할지라도 존재론적 의미에서 모두가 소중한 것이다.

그런 먼지, 모래알갱이, 돌, 바위, 행성들은 또 다시 빅뱅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가서 새롭게 창조 되어 또 다른 형태와 행성들로 변화되고 흩어지게 되는 것이다.

박계희 작가가 구현하려고 하는 것은 다름 아닌 하챦다고 생각할 수 있는 커다란 돌이나 자갈이지만 그것에서 우주가 도사리고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아주 미미한 것일지라도 나름의 영원성을 지닌 영원한 존재. 위대한 가치가 있는 우주속의 한 존재임을 역설하는 것이다. 우연과 필연 속에서 만나고 이별하는 모든 것이 영원속에서 돌고 도는 이치를 정지된 돌의 밝음과 그림자속에서 발견 내지는 깨달음을 갖게 된 것이다.

모래라는 것은 거대한 암석과 광물질이 장구한 세월의 풍화작용으로 분쇄 된 것이다. 또한 모래가 뭉쳐서 암석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필자는 모래를 통해서 배우는 것은 응집과 분열이다. 작은 모래가 뭉치면 커다란 암석이 되고 암석이 분열하면 모래가 되는 것이 우주 삼라만상, 세상의 이치다.

필자가 말하는 모래라는 것은 강가나 바닷가 모래사장에 하나의 언덕을 만들고 있는 모래이다. 박계희 작가가 바라본 모래는 사람으로 치면 집단을 이루고 무수한 마을을 이루고 있는 모습과 같이 언덕을 이루고 있는 모래사장의 모래인 것이다. 모래는 암석의 가루만 있는 것이 아니고 조개껍질이나 산호가루 그리고 유리나 생물들의 잔해가 먼지가 되어 다양한 물질들이 섞여있는 것이 모래다.

화가는 자기 주변이나 환경들 속에서 각성된 상태로 관조한다면 모두가 표현의 대상이 되고 작품의 소재가 된다. 또한 자신의 감성과 정서의 안테나에 감지되는 것들을 수렴하여 그것을 자기 내면으로 끌어들여 사고와 사색의 사료로 쓴다. 모래위에 놓여있는 조개나 소라껍질, 크고 작은 자갈들 그리고 그 위로 나있는 생물들의 지나간 흔적, 사람의 발자국, 내지는 자동차 타이어 자국 등 모래사장에 흔적을 남기는 이미지들을 박계희 작가는 그렇게 관찰하면서 예술적 감성 내지는 미학적 지성을 깨웠을 것이다. 그리하여 탐험가가 위대한 발견을 하는 것처럼 박계희 작가는 창조의 섬을 발견한 것이다. 박작가에게는 모래사장이 그리고자하는 세계가 무궁무진 펼쳐진 신세계일 것이다. 그래서 박작가는 그 발견에대해 감사하며 지치지 않고 예술혼을 불태울 수 있는 것이다.

모래 알갱이들로 치자면 아무런 힘없는 것이지만 작은 알갱이들이 모여서 모래사장을 만들고 언덕을 이루고 사막을 만든다. 강가나 바닷가의 모래사장, 모래언덕을 보면 왠지 편안하면서도 허허로운 생각이 든다. 모래라는 것이 오랜 세월 물에 씻기고 바람에 씻긴 것이다.

우리는 모래하면 모래성을 상상한다. 인간이 욕망으로 이룬 거대한 문명이라는 것이 하나의 모래성이 아니던가. 필멸하는 인간이 거대한 문명을 이루지만 언젠가는 하나의 모래성처럼 먼지로 부셔져버리는 것이 아닌가. 박계희 작가는 그런 허무한 인생이나 문명에대한 성찰 내지는 사색을 모래라는 매체를 통해서 인생을 반추한 것이다.

 욕망으로 이룬 인간의 문명이란 또는 언젠가는 필멸하는 육체같이 모두 사라진다. 이렇게 소멸하는 문명에대한 성찰을 통해 예술가는 소망한다. 영생을 추구하는 인간의 소망같은 파라다이스를 꿈꾸고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신앙같은 모래성을 쌓고 싶은 것이다.

그렇게 불가능한 것을 꿈꾸고 상상하는 것이 예술가의 일이다. 그래서 그녀는 세속적인 것을 생각하지 않고 열심히 작업을 한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피카소도 하나의 모래성처럼 인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그에 이름과 작품은 남아서 후손들이 그 가치를 누리고 있다.

박계희 작가도 피카소처럼은 아닐지라도, 모래성을 쌓고 허물고 또 쌓는 허무한 인생속에서라도 한 시대를 풍미하고 예술가로 인생을 즐기면서 아름답게 누리게 되길...하여 언젠가는 모래성처럼 사라질 인생이지만 후손들에게 길이 기억될 작품들을 많이 남기게 되길 진심으로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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