셧다운 연기 끝 330점 공개…국보·보물부터 현대미술까지 ‘K-아트’ 위상 증명
워싱턴 D.C.에서 한국 미술의 원류와 현대성이 동시에 빛나는 특별한 전시가 문을 연다.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선대 회장이 생전에 수집한 미술품을 기반으로 한 ‘이건희 컬렉션’이 마침내 미국 첫 순회 전시를 시작하며, 한국 문화예술에 대한 글로벌 관심을 다시 한번 증명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은 15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 내 국립아시아예술박물관에서 ‘한국의 보물: 모으고, 아끼고, 나누다’ 특별전을 개막했다. 이번 전시는 이건희 회장과 유족이 기증한 방대한 컬렉션이 한국을 넘어 세계 관람객 앞에 서는 첫 공식 해외 전시다.
전시장에는 삼국시대부터 조선,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시대를 아우르는 작품 330점이 한데 모였다. 국보 7건, 보물 15건을 포함해 김환기, 박수근, 이응노 등 한국 현대미술의 중요한 이정표가 된 작품들도 대거 선보인다. 특히 정선의 ‘인왕제색도’, 김홍도의 ‘추성부도’, 조선 초기 목판본 ‘월인석보’ 등은 현지에서도 큰 관심이 예상된다.
유홍준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이번 전시는 한국의 정신과 미학이 전 세계와 소통하는 새로운 장이 될 것”이라며 “문화유산의 보존과 공유라는 가치를 국제적으로 확장하는 기회”라고 평가했다.
당초 전시는 지난 8일 열릴 예정이었으나, 미국 연방정부 셧다운(업무중단)으로 스미스소니언 소속 박물관들이 임시 폐쇄되면서 일주일 미뤄졌다. 예기치 못한 연기였지만, 현지의 기대감은 오히려 더 높아진 분위기다.
전시는 한국인의 수집 문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책가도’ 섹션에서 시작된다. 책과 도자기, 문방사우 등이 정갈하게 배치된 전통 책장 이미지를 재해석한 공간은 한국 회화 속 사유의 구조를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이어 이건희 컬렉션을 대표하는 유물과 예술작품들이 빛을 더한다. 금빛 사경, 고려청자의 비색, 백자의 절제된 선, 푸른 빛의 현대 회화가 하나의 서사를 이루며, 한국 미술이 지닌 시대적 깊이와 조형적 아름다움을 전달한다.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 등장해 화제가 된 ‘일월오악도’도 전시장 한편을 채운다.
김성희 국립현대미술관장은 “한국 미술은 전통의 뿌리를 지키면서도 역사적 다양성과 혼성성을 적극 포용하며 새로운 미학으로 진화하고 있다”며 “이번 전시는 이러한 변화의 흐름을 국제적으로 소개하는 중요한 계기”라고 강조했다.
국내에서도 폭발적 관심을 받았던 이건희 컬렉션은 해외에서도 높은 호응이 기대된다. 기증 1주년을 기념해 열린 ‘어느 수집가의 초대’ 전시는 전국 6개 박물관에서 116만 명 이상이 다녀가며 신기록을 세운 바 있다.
이번 워싱턴 전시는 내년 2월 1일까지 이어진 뒤 시카고박물관(2026년 3월 7일∼7월 5일), 영국박물관(2026년 9월 10일∼2027년 1월 10일)으로 이동해 순회 전시를 이어간다. 각 도시의 문화적 특성과 박물관 성격에 맞춰 전시 구성이 다소 새롭게 조정될 예정이다.
유홍준 관장은 “이건희 컬렉션이 보유한 한국 문화의 창의성과 예술성이 세계 미술계에 깊은 울림을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